유서깊은 고택에서 하룻밤-광풍정과 제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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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7-31 21:26 조회28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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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헌고택이 있는 안동시 서후면에서는 다양한 문화재와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이야기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도학자이며,
평생을 처사적인 삶으로 일관한 경당 장흥효 선생의 유적인 광풍정과 제월대
그리고 경당 장흥효 선생의 '경당일기'를 소개해 드리고자합니다.
☞ 광풍정 가는 길 : 죽헌고택에서 안동터미널 가는 길(924 지방도) 서후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협주유소를 지나 오른쪽 편에 보인다. 광풍정 옆에는 안동장씨 칠계재도 위치하고 있어 같이 둘러 볼 수 있다.
□ 꿈에 퇴계 선생을 뵀니더! □
- 경당 장흥효 선생의 꿈에 나타난 스승들 (경당일기를 중심으로...)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라는 뜻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단어가《송서(宋書)》<주돈이전편(周敦頤傳篇)>에,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가(書家)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에 나온다.
“광풍제월이란 현판을 부착한 대표적인 안동의 정자는 하회의 ‘옥연정’과 서후면의 ‘광풍정’ ‘제월당’ 등이다. 옥연정은 서애선생의 정자로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 오른쪽에 위치한 정자로 마루 안쪽에 이 글씨가 걸려있다. 광풍정은 학봉의 학맥을 이어간 경당 장흥효 선생의 정자인데 서후면 소재지인 검제에 위치한 정자이다. 광풍정의 위쪽에 제월대가 자리하고 있다. 경당선생 당시에는 제월대에는 단지 바위로 만들어진 대(臺)만 있어 여기에서 거문고와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여기에 정자를 지었다. 경당선생의 광풍정, 제월대와 비슷한 양상의 정자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유명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가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곳인데 냇물이 흐르는 일종의 위락공간에는 광풍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내원인 별원에는 제월대를 지었다. 바로 경당선생의 광풍정. 제월대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곳이다. 자연을 향하는 마음은 특별한 지역을 벗어난 본연의 마음인가 보다.
광풍제월, 마음의 먼지, 고뇌, 번뇌, 고민을 털어낸 본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 푸르름이 벅차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라고 안동의 문화기획자 권두현은 얘기하고 있다. 아마도 경당선생이 평생을 추구하면서 살아간 가치를 정자와 대(臺)에 이름붙인 것으로 생각이 된다.처사적(處士的)인 삶을 살았던 경당 선생
‘경당 장흥효 선생은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조차 합격하지 않은 그야말로 처사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런데 경당은 단순히 처사 또는 선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학문적인 족적을 남겼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 정통을 이은 이가 퇴계 이후 5백년 동안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9인에 그칠 정도이다. 그 가운데 경당 선생이 있다.
경당 선생의 경우 도학(道學) 계통 선상에서 그의 사위와 외손자가 들어 있다. 그리고 위로는 학봉 김성일을 통해 퇴계 선생에게 연결되어 있는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수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셨다.
선생은 20대 이후에 50년간을 하루와 같이 학문에 열중했으며, 특히 동료나 제자들과의 함께 모여 토론하는 강회(講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12세 때 학봉의 문하에 올랐다. 경당선생의 학문 습득과정을 대별하면, 학봉을 통해 퇴계에 거슬러 올랐고, 서애에게 나아가 바로 잡았으며, 한강 정구에게 질의해 다듬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과 일상적인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 중심적인 글자가 ‘경(敬)’이었다.
선생의 일기 내용 중에, “남을 예로써 대하였음에도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가 성실했는지를 반성하라.”는 것이 보인다. 끊임없이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려 한 공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경당 선생은 공경을 통해 진리의 길로 들어서고자 마음먹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큰 포부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끝내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가 죽어서야 되겠는가?(生此宇宙間 終不可爲人而死耶)” 이러한 어록이 시사하는 바는, 그가 평생을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후진 역시 그렇게 만들고자 애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은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학문 수양 과정에 주자대전이 주목된다. 연보를 살펴보면 38세에 주자대전을 끝까지 읽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주자대전은 1543년(중종38)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이래 선조, 영조 등 수차에 걸친 속간이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대한 서책 간행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며 영조 대에는 주자대전을 호남에서, 그리고 주자어류(朱子語類)라는 책은 영남에서 각각 분담해 간행하게 했다는 점이다. 당시 경당이 완독했다는 주자대전은 간행된 지 20년 안팎의 최신 성리학 이론서였던 셈이다.
이를 38세 때 독파했다는 점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퇴계와 학봉 이후 영남 성리학 연구는 그 폭과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겠다. 경당의 후진들에게 대한 강학(講學)은 선생의 정자인 광풍정(光風亭)과 봉림정사(鳳林精舍) 그리고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일 경당 선생은 학자로서의 성취와 후진을 양성한 공으로 지역출신의 선배인 백죽당 배상지 선생과 용재 이종준 선생과 함께 서원으로 승격한 경광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 문하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였던 한강 정구 등이 유일(遺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방에 있는 유능한 인재)로 추천해 참봉 직을 내렸으나 은명(恩命)을 받기 전에 세상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경당은 한평생 미관말직(微官末職)일망정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완전한 학자요 처사적인 삶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경당에게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安東 張氏)로 추앙되는 여성상(女性像)의 표상인 따님 장계향(張桂香)이 있었다. 당시 무남독녀였던 정부인은 부친의 명으로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은 뒤 말미를 얻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친정을 위해 부친의 재혼을 주선했고, 마침내 안동 권씨 부인을 모셔서 슬하에 3남 1녀를 두게 했다.‘ 주간한국 [종가기행 53] 安東 張氏 敬堂 張興孝에서...
이제 경당일기에 나타난 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얼마나 간절하고 지극하면 꿈에서조차 스승들이 나타나 가르침을 얻게 되며, 공부한 내용이 꿈에서 다시 되뇌어 질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꿈에 송암, 서애, 학봉, 퇴계, 한강 선생을 뵙다
1614년 갑인년(광해군6) 7월 24일 갑술
근래에 들으니, 표숙(表叔,외숙) 이현신(李賢臣)이 이번 달 18일 세상을 버렸다고 하는지라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어제 또 들으니, 인질(姻姪,처남의 자식) 권초가 세상을 버렸다고 하는지라 또 슬펐다. 밤에 꿈속에서 송암 선생(松巖 先生)을 뵈었는데 엄연하고 단정한 자세로 사색(辭色, 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거짓되게 하지 않으시니 사람으로 하여금 송구스럽게 하였다. 한참 지나 바야흐로 사색을 대략 거두시니 이 무슨 꿈인가? 하늘에 계신 선생의 신령이 이에 경계하고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한 시간 정도 글을 읽었다.
1614년 갑인년(광해군6) 9월 13일 임술
밤에 꿈속에서 서애 선생(西厓先生)을 모시고 강도(講道)를 하였다. 잠깐 태만하고 소홀하자 선생께서 고인(古人)의 글을 읽어 가시다가 멈추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읽었다. 소학 중에 “소리가 없는 데에서도 듣는 듯이 하며, 얼굴이 없는 데에서도 보는 듯이 한다.”는 것은 중용의 “그 보지 못하는 것에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듣지 못하는 것에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김자중과 글을 논하였다.
14일 계해(癸亥) 밤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신명(神明)에 감격할 즈음에 예수(禮數, 신분에 알맞은 예의)가 전도되고, 게으르고 거만한 기운이 신체에 생겼다. 따라서 장차 잔을 올리려 할 때에 집사에게 주어 대신 올리게 하였는데 놀랍게도 신위(神位)를 지나 잔을 잡고 장차 올리려 할 때에 잔이 땅 위에 엎어졌다. 이에 송구하여 다시 일으켜 공경을 다하여 장차 다시 잔을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놀라 깨었다." 이 무슨 꿈인가? 신명이 나에게 경계하고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고인(古人)이 “성(誠)은 마땅히 귀신과 통하고 불성(不誠)은 귀신과 통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김자중과 글을 논하였다.
1615년 을묘년(광해군7) 2월 8일 을유
밤에 꿈속에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방 안에 들어왔다. 내가 여러 벗들과 의연히 질문하고 선생의 기거(起居)를 기다리다 문득 기립하여 존경심을 다하였다. 한 사람이 선생이 나아갈까 염려하여 눈물을 흘리니 이 무슨 꿈인가?
1619년 기미년(광해군11) 4월 8일 신유 소낙비
이중빙(李仲憑)군이 찾아왔다. 이때에 관에서 요서(遼西)에 수자리 갈 병사를 점고(點考)하였다. 꿈에 어떤 사람이 붓·벼루·부채 등의 물건을 가리키며 “이것은 퇴계 이 선생이 사용하시던 물건이다.”라고 하였고, 또 죽은 아우와 함께 한강 정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감읍(感泣)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 형제는 하남 정씨 형제(송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키는 것)와 같다.”고 하시니, 이 무슨 꿈인가?
1620년 경신년(광해군12) 11월 2일 을해 흐림
어제와 같이 예를 행하였다. 꿈속에서 학봉 선생을 뵈었다. 여강서원(江院)에 편지를 보냈다. 이달 4일은 곧 서애(西厓)류 선생· 학봉(鶴峯) 김 선생을 퇴계(退溪) 이 선생에게 배식(配食)하는 날인데, 개인적인 일로 향례(享禮)를 올리는 유사(有司)의 반열에 나아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을 감당할 수 없고, 지극히 송구한 마음이 생긴다. 경광서재(鏡光書齋)에서 돌아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다가 무지개가 나타나자 그쳤다.
1623년 계해년(인조1) 1월 24일 을묘 눈이 2자 정도 옴
어제와 같이 예를 행하였다. 7명이 와서 공부하였다. 꿈에 송암(松巖) 선생을 뵈었다. 인하여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용모와 걸음걸이가 어떠했는지 여쭈어 보았다. (해설, 경당 선생에게 있어서 공부의 완성은 자신이 모시는 스승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일상을 성리학적 이론에 대입시켜 깨닫아 가다
그 외에도 꿈을 통해 ‘자신 공부를 되돌아보...’(1614년 갑인년(광해군6) 8월 20일 경자)았으며, ‘꿈속에서 갑자기 깨닫...’(1614년 갑인년(광해군6) 9월 18일 정묘)고,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1616년 병진년(광해군8) 5월 9일 무인)였으며,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1617년 정사년(광해군9) 2월 20일 을묘)온다.
또한 아내의 ‘병을 고치려 개를 구하다’(1618, 무오년(광해군10) 4월 10일 기해)라고 적은 것과 ‘성리학자, 술을 이기지 못하다’(1618, 무오년(광해군10) 5월 5일 임진), ‘손녀가 설사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1621년 신유년(광해군13) 7월 3일 임인)였으며, ‘남의 자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1621년 신유년(광해군13) 21일 경인)였으며 ‘막내 아이를 낳고도 기르지 못하...’(1622년 임술년(광해군14) 9월 26일 기미)였다. ‘환갑에 아들 낳기를 바라...’(1623년 계해년(인조1) 윤10월 8일 갑오)며, ‘소나무를 베어 주린 입에 풀칠하...’(1624년 갑자년(인조2) 4월 6일 기축)는 등 생활인으로서 애환과 일상과 반성의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당 선생은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1624년 갑자년(인조2) 12월 4일 갑신)여 회갑의 일들을 적었고, 일기는 ‘친구들이 약을 지어주...’(1625년 을축년(인조3) 6월 17일 계사)는 것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당일기(敬堂日記)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 선생이 쓴 일기로 경광서원(鏡光書院) 소장본이다. 2책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책 각각의 표제에 ‘중(中)’, ‘하(下)’가 기록되어있다는 점, 중권 첫머리의 갑인년 시작 기사가 5월 5일이고 그 위에 이전 기록의 일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권 1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는 2책만 존재한다. 기록 범위는 갑인년(1614. 05. 05)에서부터 을축년(1625)까지 약 12년간이며 그 가운데 중권은 갑인년에서 무오년(1618. 11. 19), 하권은 기미년(1619. 02. 08)에서 을축년(1625. 10. 28)까지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지금으로 부터 400여년 전의 일기이다.
경당일기는 ‘성리학적(性理學的) 도학자(道學者)로서 경당 자신의 치열한 삶의 기록’으로서 조선중기 영남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학문적인 내용과 실천에 관한 기사들은 문집 기록을 넘어 저자의 실제 모습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당시 지역사회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과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경당 장흥효 선생의 본관은 안동,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이다. 부친은 팽수(彭壽),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배웠고, 뒤에 한강(寒江)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에게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서에 『경당집(敬堂集)』이 있다.
선생이 남긴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하나는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가 있는데, ‘129,600년간의 변화무궁한 자취를 드러낸 지극한 이론’이라는 일원소장도에 대해 여헌 장현광(張顯光)은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고 목재 홍여하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입을 모아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경지를 개척한 업적으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돌아 가셨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었으나 처사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경당 선생의 꿈에는 여러 스승들이 현몽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여러분은 꿈에 어떤 위인들과 내용들이 나타나시나요?
글쓴이 김일현
-. 참고문헌 및 자료
. 경당일기(敬堂日記) 원문 번역 및 해제 - 국학진흥원
. 권두현의 ‘삶의 향기를 찾아’ - 안동넷(http://www.andong.net) 칼럼
. 데일리한국 [종가기행 53] 安東 張氏 敬堂 張興孝
. 두산백과사전 등
오늘은 첫번째 이야기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도학자이며,
평생을 처사적인 삶으로 일관한 경당 장흥효 선생의 유적인 광풍정과 제월대
그리고 경당 장흥효 선생의 '경당일기'를 소개해 드리고자합니다.
☞ 광풍정 가는 길 : 죽헌고택에서 안동터미널 가는 길(924 지방도) 서후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협주유소를 지나 오른쪽 편에 보인다. 광풍정 옆에는 안동장씨 칠계재도 위치하고 있어 같이 둘러 볼 수 있다.
□ 꿈에 퇴계 선생을 뵀니더! □
- 경당 장흥효 선생의 꿈에 나타난 스승들 (경당일기를 중심으로...)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라는 뜻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단어가《송서(宋書)》<주돈이전편(周敦頤傳篇)>에,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가(書家)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에 나온다.
“광풍제월이란 현판을 부착한 대표적인 안동의 정자는 하회의 ‘옥연정’과 서후면의 ‘광풍정’ ‘제월당’ 등이다. 옥연정은 서애선생의 정자로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 오른쪽에 위치한 정자로 마루 안쪽에 이 글씨가 걸려있다. 광풍정은 학봉의 학맥을 이어간 경당 장흥효 선생의 정자인데 서후면 소재지인 검제에 위치한 정자이다. 광풍정의 위쪽에 제월대가 자리하고 있다. 경당선생 당시에는 제월대에는 단지 바위로 만들어진 대(臺)만 있어 여기에서 거문고와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여기에 정자를 지었다. 경당선생의 광풍정, 제월대와 비슷한 양상의 정자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유명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가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곳인데 냇물이 흐르는 일종의 위락공간에는 광풍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내원인 별원에는 제월대를 지었다. 바로 경당선생의 광풍정. 제월대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곳이다. 자연을 향하는 마음은 특별한 지역을 벗어난 본연의 마음인가 보다.
광풍제월, 마음의 먼지, 고뇌, 번뇌, 고민을 털어낸 본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 푸르름이 벅차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라고 안동의 문화기획자 권두현은 얘기하고 있다. 아마도 경당선생이 평생을 추구하면서 살아간 가치를 정자와 대(臺)에 이름붙인 것으로 생각이 된다.처사적(處士的)인 삶을 살았던 경당 선생
‘경당 장흥효 선생은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조차 합격하지 않은 그야말로 처사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런데 경당은 단순히 처사 또는 선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학문적인 족적을 남겼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 정통을 이은 이가 퇴계 이후 5백년 동안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9인에 그칠 정도이다. 그 가운데 경당 선생이 있다.
경당 선생의 경우 도학(道學) 계통 선상에서 그의 사위와 외손자가 들어 있다. 그리고 위로는 학봉 김성일을 통해 퇴계 선생에게 연결되어 있는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수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셨다.
선생은 20대 이후에 50년간을 하루와 같이 학문에 열중했으며, 특히 동료나 제자들과의 함께 모여 토론하는 강회(講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12세 때 학봉의 문하에 올랐다. 경당선생의 학문 습득과정을 대별하면, 학봉을 통해 퇴계에 거슬러 올랐고, 서애에게 나아가 바로 잡았으며, 한강 정구에게 질의해 다듬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과 일상적인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 중심적인 글자가 ‘경(敬)’이었다.
선생의 일기 내용 중에, “남을 예로써 대하였음에도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가 성실했는지를 반성하라.”는 것이 보인다. 끊임없이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려 한 공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경당 선생은 공경을 통해 진리의 길로 들어서고자 마음먹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큰 포부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끝내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가 죽어서야 되겠는가?(生此宇宙間 終不可爲人而死耶)” 이러한 어록이 시사하는 바는, 그가 평생을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후진 역시 그렇게 만들고자 애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은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학문 수양 과정에 주자대전이 주목된다. 연보를 살펴보면 38세에 주자대전을 끝까지 읽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주자대전은 1543년(중종38)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이래 선조, 영조 등 수차에 걸친 속간이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대한 서책 간행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며 영조 대에는 주자대전을 호남에서, 그리고 주자어류(朱子語類)라는 책은 영남에서 각각 분담해 간행하게 했다는 점이다. 당시 경당이 완독했다는 주자대전은 간행된 지 20년 안팎의 최신 성리학 이론서였던 셈이다.
이를 38세 때 독파했다는 점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퇴계와 학봉 이후 영남 성리학 연구는 그 폭과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겠다. 경당의 후진들에게 대한 강학(講學)은 선생의 정자인 광풍정(光風亭)과 봉림정사(鳳林精舍) 그리고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일 경당 선생은 학자로서의 성취와 후진을 양성한 공으로 지역출신의 선배인 백죽당 배상지 선생과 용재 이종준 선생과 함께 서원으로 승격한 경광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 문하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였던 한강 정구 등이 유일(遺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방에 있는 유능한 인재)로 추천해 참봉 직을 내렸으나 은명(恩命)을 받기 전에 세상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경당은 한평생 미관말직(微官末職)일망정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완전한 학자요 처사적인 삶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경당에게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安東 張氏)로 추앙되는 여성상(女性像)의 표상인 따님 장계향(張桂香)이 있었다. 당시 무남독녀였던 정부인은 부친의 명으로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은 뒤 말미를 얻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친정을 위해 부친의 재혼을 주선했고, 마침내 안동 권씨 부인을 모셔서 슬하에 3남 1녀를 두게 했다.‘ 주간한국 [종가기행 53] 安東 張氏 敬堂 張興孝에서...
이제 경당일기에 나타난 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얼마나 간절하고 지극하면 꿈에서조차 스승들이 나타나 가르침을 얻게 되며, 공부한 내용이 꿈에서 다시 되뇌어 질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꿈에 송암, 서애, 학봉, 퇴계, 한강 선생을 뵙다
1614년 갑인년(광해군6) 7월 24일 갑술
근래에 들으니, 표숙(表叔,외숙) 이현신(李賢臣)이 이번 달 18일 세상을 버렸다고 하는지라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어제 또 들으니, 인질(姻姪,처남의 자식) 권초가 세상을 버렸다고 하는지라 또 슬펐다. 밤에 꿈속에서 송암 선생(松巖 先生)을 뵈었는데 엄연하고 단정한 자세로 사색(辭色, 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거짓되게 하지 않으시니 사람으로 하여금 송구스럽게 하였다. 한참 지나 바야흐로 사색을 대략 거두시니 이 무슨 꿈인가? 하늘에 계신 선생의 신령이 이에 경계하고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한 시간 정도 글을 읽었다.
1614년 갑인년(광해군6) 9월 13일 임술
밤에 꿈속에서 서애 선생(西厓先生)을 모시고 강도(講道)를 하였다. 잠깐 태만하고 소홀하자 선생께서 고인(古人)의 글을 읽어 가시다가 멈추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읽었다. 소학 중에 “소리가 없는 데에서도 듣는 듯이 하며, 얼굴이 없는 데에서도 보는 듯이 한다.”는 것은 중용의 “그 보지 못하는 것에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듣지 못하는 것에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김자중과 글을 논하였다.
14일 계해(癸亥) 밤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신명(神明)에 감격할 즈음에 예수(禮數, 신분에 알맞은 예의)가 전도되고, 게으르고 거만한 기운이 신체에 생겼다. 따라서 장차 잔을 올리려 할 때에 집사에게 주어 대신 올리게 하였는데 놀랍게도 신위(神位)를 지나 잔을 잡고 장차 올리려 할 때에 잔이 땅 위에 엎어졌다. 이에 송구하여 다시 일으켜 공경을 다하여 장차 다시 잔을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놀라 깨었다." 이 무슨 꿈인가? 신명이 나에게 경계하고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고인(古人)이 “성(誠)은 마땅히 귀신과 통하고 불성(不誠)은 귀신과 통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김자중과 글을 논하였다.
1615년 을묘년(광해군7) 2월 8일 을유
밤에 꿈속에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방 안에 들어왔다. 내가 여러 벗들과 의연히 질문하고 선생의 기거(起居)를 기다리다 문득 기립하여 존경심을 다하였다. 한 사람이 선생이 나아갈까 염려하여 눈물을 흘리니 이 무슨 꿈인가?
1619년 기미년(광해군11) 4월 8일 신유 소낙비
이중빙(李仲憑)군이 찾아왔다. 이때에 관에서 요서(遼西)에 수자리 갈 병사를 점고(點考)하였다. 꿈에 어떤 사람이 붓·벼루·부채 등의 물건을 가리키며 “이것은 퇴계 이 선생이 사용하시던 물건이다.”라고 하였고, 또 죽은 아우와 함께 한강 정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감읍(感泣)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 형제는 하남 정씨 형제(송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키는 것)와 같다.”고 하시니, 이 무슨 꿈인가?
1620년 경신년(광해군12) 11월 2일 을해 흐림
어제와 같이 예를 행하였다. 꿈속에서 학봉 선생을 뵈었다. 여강서원(江院)에 편지를 보냈다. 이달 4일은 곧 서애(西厓)류 선생· 학봉(鶴峯) 김 선생을 퇴계(退溪) 이 선생에게 배식(配食)하는 날인데, 개인적인 일로 향례(享禮)를 올리는 유사(有司)의 반열에 나아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을 감당할 수 없고, 지극히 송구한 마음이 생긴다. 경광서재(鏡光書齋)에서 돌아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다가 무지개가 나타나자 그쳤다.
1623년 계해년(인조1) 1월 24일 을묘 눈이 2자 정도 옴
어제와 같이 예를 행하였다. 7명이 와서 공부하였다. 꿈에 송암(松巖) 선생을 뵈었다. 인하여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용모와 걸음걸이가 어떠했는지 여쭈어 보았다. (해설, 경당 선생에게 있어서 공부의 완성은 자신이 모시는 스승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일상을 성리학적 이론에 대입시켜 깨닫아 가다
그 외에도 꿈을 통해 ‘자신 공부를 되돌아보...’(1614년 갑인년(광해군6) 8월 20일 경자)았으며, ‘꿈속에서 갑자기 깨닫...’(1614년 갑인년(광해군6) 9월 18일 정묘)고, ‘꿈으로 공부를 완성하...’(1616년 병진년(광해군8) 5월 9일 무인)였으며, ‘오늘 공부한 내용이 꿈에 나...’(1617년 정사년(광해군9) 2월 20일 을묘)온다.
또한 아내의 ‘병을 고치려 개를 구하다’(1618, 무오년(광해군10) 4월 10일 기해)라고 적은 것과 ‘성리학자, 술을 이기지 못하다’(1618, 무오년(광해군10) 5월 5일 임진), ‘손녀가 설사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1621년 신유년(광해군13) 7월 3일 임인)였으며, ‘남의 자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1621년 신유년(광해군13) 21일 경인)였으며 ‘막내 아이를 낳고도 기르지 못하...’(1622년 임술년(광해군14) 9월 26일 기미)였다. ‘환갑에 아들 낳기를 바라...’(1623년 계해년(인조1) 윤10월 8일 갑오)며, ‘소나무를 베어 주린 입에 풀칠하...’(1624년 갑자년(인조2) 4월 6일 기축)는 등 생활인으로서 애환과 일상과 반성의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당 선생은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1624년 갑자년(인조2) 12월 4일 갑신)여 회갑의 일들을 적었고, 일기는 ‘친구들이 약을 지어주...’(1625년 을축년(인조3) 6월 17일 계사)는 것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당일기(敬堂日記)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 선생이 쓴 일기로 경광서원(鏡光書院) 소장본이다. 2책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책 각각의 표제에 ‘중(中)’, ‘하(下)’가 기록되어있다는 점, 중권 첫머리의 갑인년 시작 기사가 5월 5일이고 그 위에 이전 기록의 일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권 1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는 2책만 존재한다. 기록 범위는 갑인년(1614. 05. 05)에서부터 을축년(1625)까지 약 12년간이며 그 가운데 중권은 갑인년에서 무오년(1618. 11. 19), 하권은 기미년(1619. 02. 08)에서 을축년(1625. 10. 28)까지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지금으로 부터 400여년 전의 일기이다.
경당일기는 ‘성리학적(性理學的) 도학자(道學者)로서 경당 자신의 치열한 삶의 기록’으로서 조선중기 영남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학문적인 내용과 실천에 관한 기사들은 문집 기록을 넘어 저자의 실제 모습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당시 지역사회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과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경당 장흥효 선생의 본관은 안동,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이다. 부친은 팽수(彭壽),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배웠고, 뒤에 한강(寒江)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에게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서에 『경당집(敬堂集)』이 있다.
선생이 남긴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하나는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가 있는데, ‘129,600년간의 변화무궁한 자취를 드러낸 지극한 이론’이라는 일원소장도에 대해 여헌 장현광(張顯光)은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고 목재 홍여하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입을 모아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경지를 개척한 업적으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돌아 가셨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었으나 처사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경당 선생의 꿈에는 여러 스승들이 현몽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여러분은 꿈에 어떤 위인들과 내용들이 나타나시나요?
글쓴이 김일현
-. 참고문헌 및 자료
. 경당일기(敬堂日記) 원문 번역 및 해제 - 국학진흥원
. 권두현의 ‘삶의 향기를 찾아’ - 안동넷(http://www.andong.net) 칼럼
. 데일리한국 [종가기행 53] 安東 張氏 敬堂 張興孝
. 두산백과사전 등


